문화유산
외암마을의 문화유산
외암마을에는 많은 문화유산이 남아 있다.
국가에서 중요민속자료 제236호로 지정한 마을 자체가 문화유산이며, 특히 택호를 갖고 있는 기와집,
다른 마을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초가집등이 모두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건재고택(영암군수댁)
영암군수를 지낸 이상익(李相翼, 1848~1897)이 살던 집이어서 '영암군수댁'이라고도 불리운다. 이상익은 예안이씨의 18세손으로 외암 이간은 이상익의 직계 5대조이다.
현재 집주인은 이상익의 고손 이준경씨이며, 그의 말에 의하면 외암 이간이 태어난 곳도 바로 이 집터였다고 한다. 건재고택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데, 건재(建齎)는 이상익의 아들인 이욱렬(李郁烈)의 호이다. 현재의 가옥이 완성된 것을 건재당 때라고 한다.
참판댁(큰댁)
이조참판을 지낸 퇴호 이정렬(1865~1950)이 살던 집이라 '참판댁'이라는 택호를 갖게 되었다. 이사종의 11세손인 이정렬은 할머니가 고종비인 명성황후의 이모이기 때문에 명성황후로부터 각별한 은총을 받았다.
참판댁은 이정렬이 고종황제로부터 하사 받아 지은 집이라. 고종황제가 이정렬에게 하사해 '퇴호거사(退湖居士)'라는 사호를 영왕이 9세때 쓴 현판이 아직 남아 있다.
송화댁
송화군수를 지낸 이장현(1779~1841)으로 인해 '송화댁'이라는 택호가 붙여졌다. 이장현은 이사종의 9세손으로 호사 초은(樵殷)이며, 순조 10년 식년시에 진사가 되었다.
교수댁
이 집은 이사종의 13세손인 이용구(1854~?)가 경학으로 성균관 교수를 지냈다고 하여 붙은 택호이다. 원래 사랑채, 안채, 행랑채, 별채가 있었으나 다 없어지고 안채와 행랑채, 사당만 남아있다.
사랑채가 없어지기는 했지만 이 집도 마을의 다른 집처럼 앞쪽에 'ㅡ'자 모양의 사랑채를 두고 뒤쪽에는 'ㄱ'자 모양의 안채를 둔 튼 'ㅁ'자 집이다.
병사댁/신창댁
이 집은 홍경래난을 진압한 이용현(1783~1865)으로부터 유래한다. 이용현은 이사종의 9세손으로 무과로 급제하여 총관, 경연특진관등을 지냈다. 이용현은 6세손인 이창선까지 현재의 신창댁에 살았으므로, 전에는 이 집을 병사댁이라 불렀다.
그러나 현재는 그 후손이 서울로 이전하여 외암리에서 병사댁 택호는 없어졌다. 신창댁은 병사댁이라 불리워지던 택호가 바뀐것이다. 신창댁이라는 택호는 이사종의 12세손인 이세열씨의 부인인 보성임씨의 친정이 신창인데서 기인한다.
참봉댁
이사종의 12세손인 이중렬(1859~1891)과 그의 아들 이용후(1886~1955)부자가 참봉벼슬을 지낸 연유로 얻은 택호이다.
특히 이중렬은 1891년의 증광시에서 진사에 급제했다.
풍덕댁
이 집은 이사종의 7세손인 이택(1721~1775)가 풍덕 군수를 지낸 연유로 풍덕댁으로 불린다.
풍덕댁은 외암마을의 중앙 앞쪽에 있으며 마을의 다른 집과 같이 '┘'자 모양의 사랑채와 '┌'자 모양의 안채로 이루어져 있고, 서쪽에 '─'자 모양의 창고를 주었다. 전체적으로 건물과 건물 사이가 조금씩 떨어진 튼 'ㅁ'자 집으로 집 뒤편에는 마을의 다른 집에서는 볼 수 없는 작은 동산이 있다.
외암이간의 묘소와 신도비
외암 이간의 묘소는 외암마을의 서쪽 100여m떨어진 구릉에 서향으로 자리잡고있다. 외암 이간은 1727년 윤 3월 14일에 별세하였고 그해 5월에 온양군 유곡에 장례를 치렀다가, 1961년 3월에 현재의 위치로 이장하였다.
비의 전체높이는3.75m이다. 비문은 지돈령부사 홍직필이 짓고, 전판돈령부사 윤용구가 썼으며, 외암 이간의 6세손이며 참판을 지낸 이정렬이 글을 새겼다.원래 신도비는 묘비의 일종으로 높은 벼슬이나 학문이 출중한 인물에 한하여 무덤 근처나 큰 길가에 약간의 거리를 두고 세워 두는 것이다.
외암선생 신도비의 경우에도 마을의 서쪽에 있는 외암 이간 묘소의 50여m전방 속칭 삼상당의 평평한 대지에 세워졌던 것이 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진 것이다.
반석과 석각
반석은 외암마을의 입구에 있는 바위이다. 반석이 개천 바닥에 깔려있고 마을쪽으로 '외암동천(巍岩洞天)'과 '동화수석(東華水石)'이라는 글을 새겨두었다. 동화수석 석각은 높이 50cm, 너비 2m의 크기인데, 두께 50cm정도 되는 자연석에다 우측에서 좌측으로 큰 글씨로 새겼으며, 그 우측에 기미(己未), 그리고 그 좌측에 이백선서(李伯善書)라고 작은 글씨가 새겨져 있다.
외암동천 석각은 높이 52cm, 너비 175cm의 크기인데, 두께 50cm정도 되는 자연석에다 우측에서 좌측으로 새겼다. 끝에는 세로로 이용찬서(李用瓚書)라고 작은 글씨로 새겨져 있다. 글을 새긴 이용찬은 예안이씨 20세손으로 외암 이간의 직계 후손이며, 건재 이욱렬의 셋째 아들로 이승만정권 때 판사를 지낸 인물이다.
열녀 안동권씨 정려
정려 건물 안에는 명정 현판과 정려기가 있는데, 명정 현판에는 '열녀안동권씨지문(烈女安東權氏之門)'이라 새겨져 있다. 열녀 안동권씨는 진사를 지낸 권연(權淵)의 딸로서 어려서부터 온순하고 부모님을 봉양함에 극진한 효성으로 섬기다가 13세의 어린 나이에 예안이씨 가문의 이용덕에게 시집으로 가게 되었다.
이용덕은 예안이씨 20세손으로 외암 이간의 후손이며, 퇴호거사 참판 이정렬의 아들이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시집간다음해에 남편이 15세가 되면서 요절하였다. 청상과부가 된 안동권씨는 늙은 시어머니를 봉양하면서 변변치 못한 제물이지만 죽은 남편을 위해 정성을 다해 제사를 지냈고, 나아가 집안을 화목하게 이끌었다.
평생 과부로 지내다가 나이 86세가 되어 조카인 이홍선을 아들로 삼았으나 불행히도 세상을 떠나 이홍선의 동생인 이득선의 아들을 손자로 삼아 가문을 일으켰다. 안동권씨 부인의 삶은 마을 사람들에게 좋은 귀감이 되었으며, 마을 사람들이 문교부와 문공부에 특별히 천거하여 표창장과 함께 거액의 상금을 받게 되었다. 정려기는 안동권씨의 조카인 이득선씨의 부탁으로 1978년에 전원식씨가 글을 짓고 최병무씨가 글씨를 썼다.
외암정사(관선재, 외암서원)와 강당사
강당사는 원래 외암 이간이 강학을 하던 외암정사(巍巖精舍)였다. 조선숙종 33년 (1707)에 세운 외암 정사는 추사 김정희가 쓴 (혹은 수암 권상하의 글씨라고도 함) '관선재(觀善栽)'라는 편액 때문에 관선재로 더 잘 알려지게 되었다. 조선말기의 [온양군읍지]에서는 천서 윤혼과 외암 이간이 이곳에서 서로 강학을 했다고 적고 있다. 그런데 외암선생이 별세한 다음 한참을 지나 1820년 이조판서로 추증되고, 문정공의 시호가 내려지자 향유들이 그를 관선재에 배향하면서 외암서사(巍巖書社)라고도 일컬어졌다. 그 후 대원군 때 서원이 철거당할 위기에 놓이자 이를 피하기 위해 외암서사를 강당사라는 절로 바꾸고, 공주의 마곡사에서 불상을 모셔다가 안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관선재에는 충청남도 문화재 자료 제 333호 외암 선생문집 판각 307매가 보관되어 있다. 지금은 강법사(講法寺)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얼마전 보수할 때 '숭정후세삼을유삼월이십일일묘시중수상량(崇楨後歲三乙酉三月二十一日卯時重修上樑)'이라는 상량문이 발견되었는데 이 상량문으로 1765년 (영조 41)에 크게 보수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용추와 석각
용추(龍湫)는 송악면 강당리의 안쪽 멱시 아래 냇가에 있는 못이다 옛날 이곳에서 용이 하늘로 솟아올랐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바위에 '산고무이동침화양(山庫武夷洞沈華陽)' 여덟자를 새기었는데 일본 사람들이 동침화양의 글자를 거꾸로 따서 양화담(陽華澹)이라 하여 널리 선전하였다.
이곳은 오늘날에도 인근에 널리 알려진 피서지인데, 예전에도 외암리의 선비들이 자주 찾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용추의 바위 이곳 저곳에 외암리 출신 선비들 이름이 새겨져 있다. 외암 이간의 외암기에는 석문용추(石門龍秋)라는 표현들이 보이고 있으며 한시 외암오수에도 용추가 포함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