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변천사

마을변천사

외암마을 역사를 말하다

외암마을에는 약 5백년 전에 이 마을에 정착한 예안 이씨 일가가 지금까지 주류를 이루어 살고 있다.

1. 외암마을의 첫 주인 평택진씨

원래 외암마을의 주인은 평택진씨였다. 지금도 참봉 진한평(陳漢平)의 묘가 외암 마을 남쪽으로 약 500m의 거리인 구릉의 골말에 위치하고 있어, 과거 이 마을의 주인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또한 묘소의 남쪽에 집터와 연못의 흔적이 남아있는데, 이곳이 진참봉의 집터가 아닐까 생각된다.오늘날 외암마을에 거주하는 주민의 절반이 예안이씨다. 시작은 평택진씨 참봉 진한평의 사위인 이사종이다.

당시 진한평에게는 아들이 없고 딸만 셋 있었는데, 예안이씨 이사종이 진한평의 장녀와 혼인하면서 마을에 들어와 살게 되었다.

2. 예안이씨의 외암마을 입향

외암 이간 선생이 쓴 [외암기]에 "예안이씨가 온양에 들어와 살게 된지 이미 5세가 되었다" 고 하였는데, 조선 명종 때 장사랑을 지낸 이연은 6대조이고, 이사종은 5대조가 된다. 그렇다면 이사종 때부터 이곳에 살았던 것이 분명하다.

또한 [외암기]에서는 선조 이사종이 그의 부친인 이연의 묘를 송악의외록에 정하면서, 별업을 외암에 지어 열승정(閱勝停)의 위치에 대해 읍지에서도 기록되어 있을 만큼 널리 알려져 있었다.

예안이씨는 전의 이씨에서 갈라져 나온 분파로 10세손인 익(翊)이 예안이씨의 시조가 된다. 7세손인 이연에게는 아들이 셋 있었는데 둘째 아들 이사종 계열만 번창하고 있는데, 이사종부터 예안이씨 온양파가 시작되었다.

3. 외암마을의 큰학자 외암 이간

외암 이간 선생은 조선후기의 문신ㆍ학자로 본관은 예안, 자는 공거(公擧),호는 외암 외에 추월헌(秋月軒)이라고 하였다.

숙종 36년(1710)순무사 이만성(李晩成)에 의하여 장릉참봉(葬綾參奉)으로 천거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고 6년뒤인 숙종 42년(1716)에 다시 천거되어 세자시강원자의가 되었는데, 이때 그의 나이가 젊은데도 벼슬이 뛰어오름을 논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숙종실록에서도 '호서사인(濠西士人)이간'이라는 표현이 보이듯 이 온양 향리에서 주로 지낸 이간은 31세 되던 해 권선재를 건립하여 후학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영조 3년 51세로 일생을 마감했는데 정조는 이조참판과 성균관 좨주를 증직하였으며 순조는 이조판서를 추증하였다.

시호는 문정공이고 저서로는 [외암유고]가 있다. 마을에는 외암 이간의 학문적 유업을 기리는 사당이 있고 매년 외암 이간 선생이 사망한 음력 3월14일 불천위제사를 지낸다. 외암 선생의 묘소는 외암리 오른쪽 산기슭에 있으며 입구에 신도비가 남아있다.

4. 선비가 많이 배출된 외암마을

외암리에서는 조선후기에 많은 과거 급제자들이 배출되었다. 예안 이씨 집안의 족보를 보면 문과 급제자로 이성렬과 이정렬이 있다. 이성렬은 고종2년(1865)에 태어나 고종25년(18888)에 문과에 급제하여, 응교, 직각승지, 대사성, 참찬까지 지냈으며, 독립운동에 관여하였다.

이정렬은 고종 5년(1868)에 태어나 고종 28년(1891) 과거에 급제하였으며,참판에 까지 이르렀고, 고종황제로부터 퇴호거사라는 호를 받았다.

조선시대 생원ㆍ진사 합격자의 명단인 [사마방목]을 통해 확인된 외암출신 생원ㆍ진사는 11명에 달한다. 이외에 이사병과 이건주가 학행으로 천거되었고 이건주는 1796년(정조20)에 충청도 관찰사 이정운이 국왕의 분부에 응해 천거한 3사람중에 포함되어 있다.

또한 이건주가 죽은지 3년이 지나 1822년(순조22)에는 선비들의 상언으로 예조에서 고 광흥수 이건주의 효행에 정려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르기도 하였다.

5. 명성황후와 퇴호 이정렬

퇴호 이정렬(1868~1950)은 조선말기에 이조참판을 지낸 인물로 고종으로부터 퇴호거사(退湖居士)라는 호를 받았다. 이정렬의 할머니가 명성황후의 이모였는데, 명성황후는 이정렬을 매우 아끼어 필묵과 첨지를 내려주기도 하였다.그는 17세 되던해 명성황후에게 당시 일본의 한반도에 대한 음모가 꾸며지고 있음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24세 되던 해 과거에 급제하고 관직생활을 시작하여 이조참판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34세때 일본이 강제로 통상조약과 사법권이양을 요구하니 이에 통분을 이기지 못하고 고종황제에게 상소를 올려 당시의 책임인외부대신을 탄핵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공의 뜻이 조정에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신은 나라를 팔아먹는 조정의 신하가 될 수 없다며 관직을 포기하고 낙향하였다.

관직에서 물러나 송악으로 낙향한 그해 11월 칠은계를 조직하여 충남일대의 항일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참판댁'이라 부르는 퇴호 이정렬이 살던 집에는 지금도 유품이 많이 남아있다.